클래식 청음 시험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대두의 테리우스 덕분에 노래를 부를 필요는 없어서 차라리 좋았던 것 같다. 심지어 기말에 치를 악기 시험은 은근히 기대가 되고 고맙기까지 했다. 새로운 악기, 아니, 기타를 배울 핑계가 생겼기 때문이다.
초등 시절 꽤 오래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걸로 악기 시험을 안 보고 기타를 새로 배우겠다고 하자, 엄마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째려보았다. "그 많은 돈 들여서 피아노 학원 보내줬더니 아까울 때 때려치우고, 다시는 안 치던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변명하며 우겼다. "이제 와서 피아노 연습 새로 시작하는 게 더 힘들단 말이야! 기타는 한 달만 배우면 된대! 점수도 더 잘 준다고 그랬어!"
완전 정 반대되는 거짓말이었다. 대두의 테리우스는, "피아노는 그래도 점수를 좋게 주려고 노력하겠지만 기타는 웬만하면 하지 마라, 점수가 짤 거다"고 경고했더랬다. 그래도 난 상관없었다. 기타를 배울 기회를 놓칠 순 없었으니까.
기한은 한 학기, 약 3개월의 시간이 있었다. 집 근처의 허름한 통기타 교습소를 찾아내서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가며 연습했다. 웬만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여자애들이 부모의 허락을 받아 기타를 배우러 오는 일은 드물었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기타 학원은 우리 고등학교의 테리우스 덕분에 특수를 누렸다. 테리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결국 우리는 다 같이 재미있게 기타를 배웠다.
물론 첫 곡은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c d e f 진행이던가, 계속 반복되는, 가장 기본적인 코드를 익히기 좋은 곡이었다. 기본적인 손가락 연습을 한 다음에는, 시간이 그다지 없었으므로 곡을 빨리 골라서 몇 달 동안 그것만 연습해야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타브 악보'였다. 서점에 나가보니 [이정선 기타교실]이라는 타브 악보 교본이 있었다. 타브 악보란 일반적인 5선 악보가 아니라 기타의 6현과 네 개의 손가락 위치를 직관적으로 표기한 악보였다.
타브 악보와 함께라면 기타에 대해 잘 몰라도 웬만한 곡은 얼마든 혼자서 연습할 수 있었다. 난 한 달 정도 학원을 다니고 나서는 집에서 혼자 통기타 연습을 시작했다. 내가 혼자서 뭔가를 익히는 고독한 시간에 그렇게 오래 몰두한 적은 그때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이정선 기타 교실]에 나오는 스무 가지 정도의 곡을 이것저것 연습해보며 거의 두 달을 방에서 두문불출 보냈다. 학교는 다녔지만 방과후 공부도 하지 않았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았다.
나중에 [이정선 기타 교실]은 5권까지 출간되어 나는 모두 사버렸지만, 유독 1권에 아름다운 곡이 많았다.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곡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원곡도 모른 채 타브 악보에만 의지하여 더듬더듬 음들을 짚어 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내 손끝에서 빚어지는 선율과 화음에 마음을 빼앗겼다. 가사도 적혀 있으므로 더듬더듬 노래도 흥얼거려 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곡은 [겨울 아이]라는 곳이었다. 그 역시 원곡을 들어보지 못하고 악보로만 접한 곡이었다. 아직 인터넷이 안 되던 시절이었으니까. 난 원곡들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채 악보를 익히고 기타 운지법을 익히고 노래를 불러보았다. 아 참, 5선 악보도 같이 표기되어 있어서 노래 음은 얼추 알 수 있었다. 피아노를 배워둔 보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내가 통기타를 들고 음악 시험에 나서자 테리우스는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연주와 노래가 끝나고 나서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한 마디 뱉었다. "예쁘다.." 그렇게 아름다운 곡이었다. 점수는 99점을 받았고 말이다. 전교 탑이었다.
대두의 테리우스와 청음 시험 (3) | 2024.11.02 |
---|---|
너네 집은 판집 하니 (2) | 2024.10.22 |
노처녀 미술의 Stand By Your Man (1) | 2023.10.19 |
피아노 학원의 하농과 바흐 (0) | 2023.02.20 |
유년의 교회와 성가 합창 (0) | 2022.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