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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 집은 판집 하니

음악과 함께한 추억

by 회음 2024. 10. 2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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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나 음악을 안 듣는 집안이었으면서도, 나의 부모는 큰 집으로 이사가자 대형 오디오 기기를 새로 구매해 거실에 놓았다. 스피커의 높이가 어린 나만 했다. 스피커의 키에 맞춰 텔레비전 수신기, 라디오 수신기, 턴테이블(레코드 재생기), 카셋트(테이프 재생기) 등도 꽤 높은 크기를 자랑하며 차례로 쌓인, 종합 세트였다. 아주 쓸모 없는 기기는 아니었던 것이, 텔레비전 모니터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보려면 반드시 오디오 기기들 전체의 전원을 켜야 했다. 그야말로 웅웅 울리는 사운드로 텔레비전을 보게 됐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캐롤을 듣던 조그마한 전축은 내 차지가 되었다. 내 방으로 가져와 한쪽 벽에 공을 들여 설치했다. 그러고 보니 틀 음반이 없었다. 동네 음반가게를 기웃거리다가 당시 내가 좋아하던 라디오의 디제이이자 가수의 음반을 결국 모두 샀다. 네 장이었다. 단짝 친구가 좋아하며 선물했던 팝송, 웸의 테이프도 음반으로 업그레이드 했다. 

전축을 설치한 쪽 벽에 커다란 음반들을 이리저리 배치해 장식하고 그림 같은 것들도 붙여두니, 제법 사춘기 소녀의 방다운 느낌이 났다. 내친 김에 헤드폰까지 구매하고 음악에 푹 빠져 지내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특히 한창 인기 절정이던 서정적 노랫말의 가수의 음반을 매일 차례로 틀었다. 30분마다 판을 뒤집어야 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듣고 또 들으며 노랫말과 선율을 음미했다. 

그때 나랑 같이 하교하던 친구들이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우리집 바로 뒷 동으로 이사왔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좀 의외였다. 우리집 바로 뒷 동은 작은 평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 가수는 인기 절정에서 갓 결혼을 한 참이었는데, 그렇게 유명한 가수가 신혼집으로 변두리 지역의 조그만 아파트를 얻었다는 게 좀 의아했다.

사실 난 굳이 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가수의 팬도 아닌 내 친구들이 꼭 가야 한다며 성화였다. 그녀들은 운동선수 파였다. 배구 선수들을 좋아해서 자주 배구장에 가고 선물 사들고 가고 전달식 한다며 난리치던 아이들이었다. 같은 반이어서 매일 집까지 같이 오며 조금 친해지긴 했지만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팬심이라 난 그녀들이 배구 선수 얘기를 떠들 때면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근데 갑자기 가수의 집에 찾아가자니? 그래도 되는 걸까? 한 아이의 아버지가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어서 주소를 알아낸 거였다. 암튼 내가 한창 좋아하던 가수인 데다가 바로 우리 집 뒷집이라니, 못 이기는 척 따라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냉큼 집에 들어갔다가 음반 4장을 모두 가지고 나왔다. 

그의 아파트는 복도식 7층이었다. 아직 샤시(!)를 달지 않아 바깥 바람이 몰아치는 가수의 집 앞 복도에서 우리는 교복을 입은 채로 덜덜 떨면서 기다렸다. 늦가을이어서 그랬는지 긴장이 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니까 서로 옆구리를 찔러서 한 명이 결국 초인종까지 눌렸다. 그러자 드디어 문이 열리면서 가수의 아내, 아니 새신부가 나왔다. 나랑 나이차도 워낙 많이 나는 남자 가수의 아내에게 전혀 유감은 없었지만 뚫어지게 쳐다보기는 했다. 

다들 어쩔 줄 모르고 쳐다만 보고 있는데, 우리 중에서 제일 똑똑하고 발랑 까졌던 친구가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며 "우리 팬이에요! 오빠 보고 싶어서 왔는데 한 번만 얼굴 보여 주시면 안 되요?" 하고 외쳤다. 매우 세련되고 보였던 가수의 아내는, 침착한 태도로, 아파트 건물 앞 주차장에 내려가서 잠시 기다리라고, '오빠' 곧 나올 거라고, 말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즉시 건물 입구로 나가 바로 앞 주차장에 서서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도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려서 드디어 가수가 아내와 함께 나왔다. 진짜 팬이지만 숫기가 없던 나는 음반들을 움켜쥐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원래는 관심도 없던 다른 애들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역시나 팬심이 있고 팬 활동(?)을 경험해봐서 그런지 '응대' 실력이 눈부셨다.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 가수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해댔다. 

그런데 가수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외출을 하려는지 아내와 똑같은 황토색 버버리 코트를 입고 나온 그는 아이들의 질문에 무성의하게 대꾸하며 짜증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그럴 만도 했다. 예고 없이 빈손으로 집까지 쳐들어온 중학생 팬들이 반가울 리가. 결국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발로 밟고 한쪽 끝을 다른 발로 들어올렸다가 놓으며 신경질적인 딱딱 소리까지 주차장 전체에 울렸다. 

안 되겠다 싶던 내가 결국 나서서 음반들을 내밀었다. "사인 좀 해주세요." 자신의 전작 레코드들을 내미는 여중생을 보고 가수는 약간 풀어지는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어이쿠야, 얘, 너네 집은 무슨 판집 하니? 뭘 이렇게 많이 샀어?"

하지만 내가 순간 당혹했던 건 그의 퉁명스러움이 아니었다. 매일 라디오 디제이로서 재치 있는 입담를 자랑하던 가수 입에서 나온 저렴한 코멘트가 충격적이었다. 쑥쓰러움의 표현인가? 아무리 그래도 자기 음반들을 다 사서 사인해달라고 내미는 소녀에게 무슨 저런 멘트를? 게다가 음반가게도 아니로 판집…

원래도 음악은 좋아해도 음악가까지 좋아하지는 않던 나의 성향에 쐐기를 밖은 날이 그날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술적 결과물을 감상하고 즐기면서 느꼈던 행복한 시간이 그걸 만든 사람과 만나거나 그 사람의 삶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깨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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