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두의 테리우스와 청음 시험
고등학교 때 내가 다닌 학교는 예술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왕년의' 명문이었다. 그래서 무용이나 미술, 음악 같은 수업에 법정 최고 시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다른 학교들은 그렇지 않았다. 예체능 과목 시간에 다른 과목 자습을 시키는 학교도 많은 시대였다.
1학년 때는 일주일에 각 두 시간씩, 2학년 때도 무려 한 시간씩 예술 과목들에 배정되었고 평가(시험)도 엄격하게 했다. 일주일 동안 총 여섯 시간의 체육, 미술, 음악을 듣던 1학년 때는 내가 예술고에 왔나 싶었다. 인문계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대학 입시 공부를 시키는 데 별 의욕(?)이 없었고 당연히 학생들의 대입 성적은 형편없었다.
그중 음악 수업을 담당한 교사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젊은 여성 교사로 교내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또 한 명은 테리우스라 불리던 중년의 남자 교사였다. 별명은 테리우스지만 그건 그냥 머리를 길게 길러서 붙인, 멸칭에 가까운 별명이었다. 정확한 별명은 '대두의 테리우스'였다.
나는 안타깝게도 2년 내내 남자 교사가 담당하는 반이었다. 그는 작은 키와 커다란 두상에 어울리지 않는, 이상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게다가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 성깔 하는 신경질에, 좀 특이한 수업관, 혹은 남다른 평가 방식 역시 보유하고 있었다. 늘 중간 고사는 음악 이론 시험을 치르고 1학기 기말 고사는 클래식 청음 시험을, 2학기 기말 고사는 악기 연주 시험을 보았다.
글쓰기 모임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가창 시험은 안 보았냐고 물어본다. 그제야 '엇' 하는 기분이 되면서 아리송해졌다. 가창 시험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교내 합창 대회가 있어서 합창 연습을 한 기억은 있는데, 음악 시간에 교실 앞으로 나가 노래를 부르거나 하면서 시험을 본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내 기억이 삭제된 걸 수도 있지만, 만일 음악 시간에 가창 시험은 보지 않은 게 맞다면,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 음악 교사가 가창 시험을 싫어한 것이다. 그는 성악을 전공했다고 했다. 그 말을 하던 뉘앙스는, 자기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성공할 운명이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성대가 망가지는 바람에 요모양 요꼴의 고교 교사가 되고 말았다는 한탄이었다. 그래서 그는 음악 시간에 되도록 노래 부르기를 안 시키며, 학생들 하나하나의 돼지 멱따는 소리를 차례차례 들어야 하는 가창 시험 같은 건 절대 보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다. 이게 맞는 것 같다. 이제 기억이 난다.
오래 피아노를 배운 덕에 음악 이론 시험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피아노를 더럽게도 못 치고 싫어했지만 그래도 초등학교 때 참고 배운 쓸모가 이렇게 있구나 싶어서 즐거웠다. 문제는 클래식 청음 시험이었다. 음악 시간 한 시간 동안 두어 곡의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시험에 나온다니 처음에는 열심히 듣던 아이들의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지다가, 음악 시간이 끝날 무렵이 되면 반 전체가 전멸하곤 했다.
이런 음악 감상 시간을 몇 시간 가지고 나서 기말 시험 때 이 곡들의 일부를 들려주고 제목을 적게 한다고 했다. 도무지 시험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나타든 교항곡이든 실내악이든 몇십분은 되는 길이에다가 매번 테마도 바뀌는 곡의 흐름을, 한두 번 정도 들어보고 무슨 수로 외운단 말인가. 내가 무슨 지휘자도 아니고 인문계 고등학생일 뿐인데. 게다가 그런 음악 감상 시간에는, 초반 이후로는 집중이 안 되다가 내처 쿨쿨 자기 바빴다.
아이들 사이에서 녹음 테이프가 돌기 시작했다. 음반 가게에서 불법 복제한 곡들을 공 테이프에 담아서 반복해서 듣는 시험 대비였다. 나도 한 개 사서 워크맨에 넣고 들었다. 들을 때마다 여지없이 잠이 들었지만 어찌어찌 시험은 봤다. 이를 갈면서.
그때 시험 공부로 들은 곡들 중 단 하나 또렷이 기억 나는 곡은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다. '작은 밤의 음악'이라는 뜻이던가. 정말 모차르트다운, 특별한 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야 찾을 수 없는 잔잔하고 명랑한 곡이어서 시험 당시 외우느라 가장 힘들었던 곡인 듯하다. 그래서 아직도 기억이 나는 듯하지만, 그 음악이 어딘가에서 흘러나올 때면 나는 인지의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역시나 K고등학생. 모차르트조차 고교 기말 음악 시험의 추억으로 기억하게 되다니. 우리 학교 같은 경험을 한 고등학생조차 많을 것 같지는 않지만, 씁쓸한 음악 교육의 추억이다. 아니, 오히려 'K교육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려나? 덕분인지, 제목 아는 클래식 음악이 아주 없지는 않은 성인으로 자라났으니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LpcjzxoGlI4